목사에게 설교란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혹은 종합영성이다. 설교에는 그 설교를 하는 사람의 인격, 삶, 기도 생활, 신학적 안목과 전망, 성서 이해, 인문 정신이 전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해산의 수고에 비견된다. 물론 이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는 먼저 설교 본문을 선택한 다음 그 성서 본문을 완전히 암기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원어 성서와 각종 번역본을 비교하며 성서 본문의 문장구조를 살피는 동시에 많은 주석을 참조하여 본문의 원의를 찾아낸다. 또한 기성 학자들의 성서 해석과 자신의 묵상을 통합하여 최선의 해설을 도출한다. 설교의 뼈대를 구축한 후에는 그 뼈대에 적당한 살을 붙여 모양새를 내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평소의 독서 정보를 동원하여 논리의 흐름을 조율한다. 나아가 설교가 단순히 정보의 전달이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청중의 실제 영성과 삶에 접촉되게 하기 위해 신자들의 형편과 실존을 고려하여 텍스트와 인간이 서로 조우할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부단한 기도가 뒤따른다. 그 기도의 갈피마다 성령의 은혜를 통해 평소에 전혀 생각도 못했던 어떤 번뜩이는 영감과 통찰력이 부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알고 있는 설교의 준비 과정이다.
목사는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갖고 강단에 올라 그 한 편의 설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채 진액을 쏟아붓는다. 그는 설교문 전체를 완벽하게 암기하되 그러나 문자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성령의 자유하심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에 일정한 공간과 여유를 부여하며, 경박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가짐에 조심하면서 말씀을 전하다. 그때 때로 포호하는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때로 9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에 볼카운트가 꽉 찬 상황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씀을 증거하며, 때로 죽어가는 꽃을 살리기 위해 애절하게 잎사귀를 만지는 정원사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간곡하게 권면한다. 그에게 설교는 인간의 화려한 만담이나 강연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현현하는 신적 계기의 순간이다. 그는 설교의 영광을 믿으며 또한 거기에 순종한다.
설교가 끝나고 강단을 내려온 목사에게는 이제 무거운 짐을 막내려놓았다는 안도감이 시퍼런 파도처럼 거품을 내며 밀려온다. 그의 영혼은 잠시 동안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곧이어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과 자책감이 마치 지진에 땅이 갈라지듯이 영혼의 균열을 일으키며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는 설교의 영광에 대한 극심한 중압감에 시달린다면, 설교가 끝난 후에는 늦가을 첫서리처럼 싸늘하게 찾아오는 설교의 실패에 대해 자책과 후회에 몸서리친다. 자신의 설교가 얼마나 창백하고 비겁했는지,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했는지를 자책하는 것은 비단 설교에 대한 누군가의 살벌하고 야비한 평가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스스로 자신의 설교를 판달할 때 고비고비에서 아직도 너무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스스로 성찰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해석, 잘못된 적용,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자랑과 혈기와 판단을 끼워넣은 것에 대한 절망감, 때로 잠시 동안 다른 사람들의 후한 평가에 눈이 멀어 어깨가 으쓱거렸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복합되어 그의 영혼은 어때가 축 늘어진다. 설교가 끝난 후 어김없이 목사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한다.
설교자는 설교 전에는 두려움에 떨며, 설교 후에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는 매주일, 한평생 이 영혼의 그네 타기를 반복하는 자다. 이 외로운 싸움은 아무도 대신해 줄수 없는, 오로지 그만이 감당해야 하는 고독한 투쟁이다. 이것이 목사의 소명이자 숙명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탄의 참소에 넘어져 좌절하며 포기하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 자신의 영혼의 그네를 흔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가운데 아주 조금씩 성화되어가는 자다.